연약함에서 담대함으로

2016년 5월 29일 주일 설교 요약
히브리서 4장 14절5장 10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에 연결시키고 있는 본문 말씀입니다.
대제사장은 제사장들 중에서 머리가 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신약에서는 로마 행정관들에 의해 임기제로 변형되는 등 달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왜 사람이 되셔야만 했을까, 라는 질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굳이 사람이 되셔서, 고생을 하시고, 우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시지 않고도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미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 말씀의 완성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제사의 직분, 제사의 완성이 들어가 있으며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독자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지만, 히브리인들 즉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서신서를 받은 독자들에게는 제사제도, 제사장, 대제사장의 얘기가 어렵지 않게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했을까요?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대속죄일에 성막 가장 안쪽 언약의 궤가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설명된 절차대로 피를 뿌리는 등의 일을 행합니다.
이 일을 대제사장들만이 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5장 1절부터 4절까지 읽습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대제사장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에서 선택된,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종신직입니다.
대제사장은 일반 백성보다 더 엄격한 생활이 요구되는 위치에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기에 백성들의 범죄에 대해서도 비난이 아니라 용납과 관용의 자세를 보일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선택된 자로서 백성을 위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속죄일에 속죄제사를 드리면서도 다른 사람의 제사보다 먼저 자신의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 대제사장의 직분이 귀하게 보이지만 연약하고 부족한, 한계를 지닌 사람들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을 비교하면, 똑같이 유혹을 받는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고 성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분이지만 예수님은 스스로를 위해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드리는 제사의 중요한 내용이 이것인데, 5장 7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평생 하신 일이 통곡,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대제사장이 자기 백성을 위해 제사하고 속죄하는 일을 감당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평생 자기 백성을 위해서 통곡하며 눈물의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정결예법을 지키며 사는데, 이는 대속죄일의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날에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켜서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지 않으면, 규례를 따르지 않으면 오히려 죽음을 마주하게됩니다.
절차를 지켰을 때 백성들에게는 속죄의 은총이 허락되어집니다.
대속죄일에, 일년에 딱 한 번 지성소의 휘장이 열려지고 제사장이 거기에 들어갔을 때에 백성들은 그 지성소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4장 16절에 이렇게 얘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서 너희는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합니다.
14절, 15절에 보면 ‘… 그러므로 담대히 나가라’ 라고 합니다.
배짱을 가지고 망설임 없이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을 어렵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제는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는 바로 예수님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기에 연약함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기에, 나의 연약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만약,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한다면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입장에서는, 환경이 비슷하다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인데, 그것만을 생각하면 나와는 동떨어지고 이질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인들, 헬라인들은 신에 대하여 무감각한,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설명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동떨어진 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이겨내셨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그 분은 하나님이셨으니까, 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경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4장 15절 말씀을 보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연약함을 겪으시고 고통을 당하고 시험을 받으신 이시라고 합니다.
스스로 만드신 세상에 오셨는데도 피조물로부터 거부당하는 아픔을 겪으셨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거절의 상처 때문에 과거의 아픔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거절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욕을 당해서 힘든 기억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면서 피조물로 오신 그것 자체가 모욕이었고, 따르던 사람들도 수치심을 주고 죽이기까지 하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받는 관계 안에서의 상처들 역시 충분히 받으셨습니다.
삶의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못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또한 예수님께서도 충분히 당해 보셨습니다.
그러한 연약함 속에 계셨기에 예수님은 나를 이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다, 나를 충분이 이해하신다, 공부해서가 아니라 직접 당해보셨기에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선 우리가 왜 자주 넘어지는지, 왜 그리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는지 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뭐가 제일 필요한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 같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나보다 나의 필요를 더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모두 경험해보신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도움은 정확하고, 절실합니다.

이런 연약함 속에서 우리가 왜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15절에 보듯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은 연약함 속에서 죄의 유혹도 받으시고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신 그 분께서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십니다.
담대함이란 죄의 유혹, 넘어짐, 실패에서 우리를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하나님, 보기만 해도 겁날 것 같은 하나님을 우리가 주저함 없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앞에서 먼저 지성소로 들어가신 대제사장이시기에, 먼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문제를 없이하여 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지성소로 들어가니 하나님께서는 내 안의 예수님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담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편할 수 있습니다.
숨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변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담대하지 않을 때엔 하나님 앞에서 뭔가 자꾸 내 입장을 설명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냥 고백할 수 있습니다,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죄송한 마음이 있더라도 더 이상 나의 수치심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제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뭔가 어긋나는 느낌을 받거나 말이 안통하거나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런 것 다 걷어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담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할 때마다 내가 부족했던 부분을 고백하지만 뭔가가 해결되지 않은 느낌으로 찜찜하게 일주일을 다시 살아가기도 합니다.
담대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고,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대로 구할 때에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자신감을 주시는 것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사람은 이제는 연약함 속에 헤메이지 않아도 됩니다.
나에게 있는 연약함들, 이제는 끊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내게 있는 무력감에, 매일 하나님 앞에서 망설이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무력감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는 연약함, 무력함, 무너짐 이런 것을 담대하게 떨쳐버릴 수 있게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속죄일에 제사를 드리면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뒤만 바라보고, 속죄의 제사가 끝났을 때 그 지성소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뒤를 따라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광,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사람은 그 영광을 맛보는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는 연약하다고, 나는 부족하다고 혹시 매일 똑같은 삶 속에서 그냥 헤메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인데, 나의 연약함, 나의 수치심, 나의 모욕감, 나의 상처, 이미 다 경험해보셨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담대함을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뒤를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