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라

2015년 7월 26일 주일 설교 요약

출애굽기 25장 10절-22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한 주간 QT 묵상하신 내용을 함께 나눔으로써 더욱 친숙하게 말씀생활을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특별한 궤짝, 언약궤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길이는 110cm 정도 너비는 70cm 정도 크기의 궤짝인데, 말씀에 나온 내용을 보면 재료로는 조각목 – 검을 조 뿔 각 – 나무의 겉모습을 보고 얘기하는, 싯딤나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아카시아나무라고도 하지만 우리가 아는 아카시아와는 좀 다릅니다.
성막에 쓰이는 물건의 대부분 재질이 조각목입니다.
모양의 특징으로는,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금을 입히고, 들 수 있는 채를 만드는데 이것 역시 금을 입힙니다.
성막의 물건들 대부분은 금으로 만들거나 혹은 나무로 만든 후에 금을 입힙니다.
이 궤짝 앞에서 뭘 하는가에 대해서 22절 내용을 보겠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땅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에 부르셔서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식으로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장 중요한, 이동생활에 쓸 천막중에 제일 중요한 천막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안에서 쓸 기구들은 웬만하면 다 금으로 만들고 금을 입히라고 하시니 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이 천막을 지을 때에 금 가락지 귀걸이와 천 가죽 등을 모두 가져다 바쳐서 나중엔 그만 가져오라고 모세가 얘기하는 상황이 됩니다.
천막 밖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마당에는 짐승을 잡는 제단이 있고, 천막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에 등잔대가 있습니다.
떡을 올리는 상, 향을 올리는 향단도 있으며 천막 안에는 휘장을 쳐서 또 다른 방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안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지성소라는 곳입니다.
그 지성소 안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언약궤 하나만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여기가 바로 네가 나를 만날 곳이다, 내가 여기서 너를 만나고 싶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그 안에 들어와서, 꼭 이 안에 들어와서, 이 궤짝 앞에서 나를 만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이유가 뭘까요?
이 궤짝 안에는 특별한 것이 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이 있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언약궤의 다른 명칭들로는 증거궤, 법궤 등이 있습니다.
이 궤 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돌판에 계명이 쓰여져 있는 말씀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주의 법이 담긴 곳이에요.
모세 혹은 그 이후의 제사장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언약궤를 볼 때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제일 중요한 물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언약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되새겨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된 증거가 바로 이 안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그들의 삶에서 약속이 나타나야 하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성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한 신앙입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그 분의 인격을 느끼지 못하고 그 분의 생각을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신앙이 되는겁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자칫 잘못하면 나이를 먹고 직분을 가질지라도 그 신앙이 내 삶에 내 속사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나를 변화시키고 그를 통해서 기쁨이 나타나고 바깥으로 표출되어야 하는데 아무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는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말씀 속에서 ‘날 만나라’ 명령하시는데 그 안에서 주님과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겁니다.
지난 일주일 살면서 이 말씀을 가지고 그 안에서 주님을 얼마나 많이 만났고, 얼마나 깊은 주님과의 관계가 생겼습니까?
아무런 영향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결국은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부부가 살면서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인격적으로 교제하여 생각이 같아지듯이 주님과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대화하며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내어 드리고 아파하고 기뻐하며 인격적인 교제를 갖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곳으로 나아와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라고 하신 것이고, 그렇지 않고서는 종교적인 허울을 벗기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을 듣고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인격이 주님의 인격으로 변화되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것인줄 믿습니다.

그리고 왜 또 주님께서는 이곳에서 날 만나라고 하셨는지 두번째 관점을 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궤짝에는 주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자의 윗부분에는 (17절-21절) 이러한 특징이 있습니다.

순금으로 만나라 하였으며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시은좌 곧 은혜의 자리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시은좌 곧 은혜의 자리시은좌 곧 은혜의 자리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시은좌 곧 은혜의 자리시은좌 곧 은혜의 자리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만나라 하였으며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궤짝의 위에 같은 크기로 속죄소라고 하는 부분을 만들어 덮으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한 덮개의 용도가 아닌, 죄를 사해주는 곳으로서 영어로는 Mercy Seat, 자비의 자리라고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귀한 자비는 우리의 죄를 속해 주시는 것, 없애 주시는 그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이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속죄소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져있거나 금으로 덮여있는데, 과연 금빛이 휘황찬란한 광경이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지성소 안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고 별도의 조명시설도 없어서 전혀 금빛이 날 환경이 아닙니다.
대신, 이 안에는 특별히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가 동물의 피를 뿌리게 됩니다.
함부로 닦을 수도 없는 이 언약궤에는 금빛보다는 핏자국과 피냄새가 오히려 더 나타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곳에는 피냄새가 풍겨야합니다.
핏자국이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주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아니고서는 속죄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날 만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나기 위해 이 곳에 들어가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속죄소의 천사들이고 그들을 보면서 주님의 자비가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주님의 자비, 속죄,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거룩하지도 정직하지도 못하고 의로운 것도 아무것도 없으니 멸망당해도 마땅한 존재이지만 이런 나의 모습을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그 자비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러 이 곳에 들어왔을 때에는,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못난 존재일지라도 불안하고 두렵고 무섭지 않고 오히려 안심이 됩니다, 평안이 임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곳이 바로 이 속죄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만날 때마다 주님의 자비가 느껴지기를,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신 은혜와 사랑이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곳에 들어와서 나를 만나라고 하십니다.
이 곳에 들어와야만 내가 주는 자비를 네가 알게 될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번째, 주님께서는 왜 이 곳에 들어와 나를 만나라고 하실까요?
주님을 이 곳에서 만난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여 예루살렘을 세웠을 때, 궁전을 세우며 성전을 지었습니다.
옮겨다니는 천막이 아닌 성전을 지으며 솔로몬은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에 거하시겠습니까, 하늘에 거하시겠습니까?
땅조차도,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용납할 수 없겠거늘, 기껏 제가 만들어 놓은 성전에 계시겠습니까?
이 잘 지은 성전 조차도 초라하고 협소한 곳이라고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성전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두겠다고 약속하신 곳이기에, 주의 눈과 귀가 이 곳을 향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어두컴컴하고, 등잔대를 지나 휘장을 거쳐서 지성소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아무런 조명 시설도 없는 곳이고 겹겹의 가죽으로 인해 세상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상을 만든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여기에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로 이 그룹들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곳에서 내가 너와 만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주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주님이 임재하신 그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꼭 여기만 계신가요?
산, 바다, 그 어디에도 다 계시는 분이신데 꼭 여기에만 들어가야 할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지성소, 어두컴컴하고 고요한 곳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고 싶다”
이 곳은 주님이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곳은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곳, 다른 것은 볼 수 없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 주님의 음성에만 귀기울이는 곳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이렇게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그 곳, 주님의 말씀이 있는 그 곳, 주님의 자비가 있는 그 곳, 주님께서 계시겠다고 하신 그 곳에 들어가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를 통해 지성소로 부르신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부르시는 줄을 믿습니다.
여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싶다, 말해주고 싶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 말고 꼭 이 곳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 곳으로 나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쁜 삶을 사는 우리들이라서 언제 기도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족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에게도, 바쁘게 살면서 틈나는대로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꼭 이 지성소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더 이상, 바쁜 것에 매여서 살지 마십시오.
놓치지 말아야 할 한가지 – 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과 자비 앞에 서고 주님의 임재 속으로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이 지성소에서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독대하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한주간 살면서 지성소로 들어가고픈 마음이 들지 않으시나요?
들어가면 거시서,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여러분을 위하는 말씀을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런 신앙이 아니라, 주님께서 바라시는대로 따르는, 주님과 독대하고 인격으로 교제하는 만큼 주님을 닮아가는 그런 신앙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편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귀찮을 것 같은 그 곳으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위하고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하여서, 이 시대에, 또 우리들을 부르시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삶을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지성소, 주의 말씀이 계신 곳, 주의 자비가 흐르는 곳,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곳.
그 곳에서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가운데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