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받아들인 복음

갈라디아서 2장 1절-10절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 사도 베드로를 책망했었다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서신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베드로와 비교하기는 어려운 위치였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두 사람이 교회 내에서 권력 암투를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먹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를 같이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자 이방인과 식사를 안 한 것처럼 자리를 슬쩍 피했던 것입니다. 먹는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관한 문제였고 이 율법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다는 것을 정말 잘 알고 있는 베드로가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사람의 눈치를 볼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 밖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분위기에 맞추려 하고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의 눈치를 보며 신앙을 인정 받으려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위선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리더의 위치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으로 인해 처음 믿음 생활 하는 사람들은 고스란히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단인가 아닌가를 떠나 교회 안에 복음을 잃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 눈치 보는 태도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자신 조차도 피곤하게 만듭니다.

이런 신앙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 들이고 나니 그 분의 십자가에서 내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니 율법 앞에 당당합니다. 율법이 ‘당신은 죽을 죄인이다” 라고 말하면 그래서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의 정죄에 묶이지 않는 해방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살게 된 것은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게 있는 새로운 생명력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자신의 삶에 내면화 된 것입니다.
십자가가 삶의 일부분으로서 종교적 표시가 아닌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다시 살게 하신 주님을 삶
속에서 통째로 의지하고 사는 삶입니다. 생각, 감정, 의지,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고 사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다시 사신 그분으로 인해 내가 살고 있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