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4일 주일 설교 요약
히브리서 12장 1절-3절 말씀입니다.
성도의 삶을 전투, 전투하는 군인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그런 구절들이 나오지요.
또한, 스포츠와 같은 특별한 이벤트에 비유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성도의 삶을 달리기에 비유하며 인내하며 경주하라고 합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꾸준함을 의미하고, 페이스 조절을 잘 해야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잘 한다고 빨리 뛰다가는 중간도 가지 못하고 지쳐서 쓰러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마라톤보다 더 긴, 전 인생을 걸쳐서 경주하는 일입니다.
이 긴 경기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오늘 본문을 통해 상고해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믿음의 긴 경주를 잘 하기 위하여 두가지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나를 위한 경주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경주라는 것입니다.
이 경주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믿음의 창시자이시고,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키시는 그 분을 바라보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왜 이 경기를 해야 하는지를 설득해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인데 내가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해야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 경기가 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이지만,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에, 내가 소속된 곳은 바로 주님 나라이기에 경주를 하는 마음 자세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경기는 나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 단체로서 경주하는 것이기에 더욱 힘을 얻습니다.
1절 말씀에서의 “우리”라는 것은 삼일교회 공동체로서의 우리를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허다한 증인”들과 연관된 개념의 우리입니다.
즉, 11장에서 말씀하신 그 믿음의 선진들을 포함한 우리입니다.
11장 39절과 40절의 내용을 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의 선조들을 다 나열하고 설명하기를, 마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인생이 끝난 듯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도 또한 그들처럼, 그들과 함께, 그들과 똑같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약속을 바라보고, 때로는 고난 속에, 때로는 기대 속에, 그리고 승리, 기쁨, 애통함 속에 있었던 그들이었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봤던 믿음의 약속들은 우리에게 이어졌고, 우리와 더불어 그들은 온전함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허다한 증인들은, 그들이 우리의 경주를 내려다보고 있거나 우리가 그들과 소통한다는 뜻까지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증인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경주해야 하는지를 먼저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기 보다는, 먼저 산 사람들의 모습이기에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동료로서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도 주님 나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사건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도 경주하며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위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달라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도 그들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삶 속에서 경험하며 믿음의 경주를 하기 바란다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문의 말씀처럼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버려야 합니다.
죄를 버리라는 말에는 누구나 동의를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버리기 힘들거나, 버리고 싶지 않게 다가오는 것이 죄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죄악은 달콤하게 다가오기에 그렇습니다.
죄인줄 알면서도 이렇게 사는 것이 더 편하게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죄짓고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면 더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여기 써있는, 얽매이기 쉬운 죄라는 얘기는 자기 자신이 죄를 짓다가 어떤 순간부터는 죄의 교묘한 속성에 의해서 자신이 포위되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위되어 공격당하는 이 상황을 얽매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더 좋고 편하고 행복해 보였지만 결국은 죄에 빠져서 자신의 미래를 빼았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길을 갔을 때에 어떻게 될지 다 알고 계시기에 죄라고 강조하시면서 우리에게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기에 관여하고 징계하십니다.
또 버려야 할 것은, 무거운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경주를 하는 선수들이라면 체력과 체중 관리를 합니다.
이 무거운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별로 악하지 않은 것, 다들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것이 무거운 것이 되어서 자꾸 나의 시선을 빼앗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절제와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별 문제가 없더라도, 그냥 그렇게 살면 내게 무거운 것이 되어서 경주를 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경주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이 무거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 스스로 마음 속에 떠오르는, 남들이 보기엔 별 문제가 안되더라도 내게 생각되는 무거운 짐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경주를 잘하기 위해서는 주님처럼 하자고 합니다.
2절과 3절 말씀을 읽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예수님은, 목표지점을 분명히 보시는 분이었기에 참으셨다고 합니다.
경주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기에, 당장 눈 앞에 놓인 문제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십자가라는 큰 문제가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죽음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 분을 조롱하며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는 악독한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 줌 먼지도 안되는 인간들의 이러한 거역함을 창조주 예수님께서는 참으셨는데, 십자가 그 이후를 보셨기에 그러셨습니다.
십자가 그 순간이 목표가 아니라 그 다음이 목표였기에 그렇습니다.
목표지점이 있기에 사업도 하고 가정에서 살림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땅 위에서 한 평생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목표지점을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일생은 다음에 다가오는 삶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현재의 생활에 모든 것을 걸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목표지점을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지금의 인생 이후에 어떤 것이 있는지 보이지 않기에, 그 목표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노아처럼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은 후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지은 그 믿음을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하여, 홍수의 심판에 대하여 얘기를 해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노아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분부에 순종합니다.
보이는 것만 따를 것이라면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다음 생을 준비하는 것이 지금의 인생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목표지점을 제대로 보는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믿음의 경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현실의 문제점 때문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목표지점을 분명히 보시고 항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모욕, 부끄러움, 거역하는 일도 감내하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경주하며 더욱 목표지점을 분명히 바라보고 참아내야 합니다.
경주를 하면서, 주님 나라에 속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처럼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자녀 누구도, 어떤 사람도, 그저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는 대충 살아도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경주를 하면서 대충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아, 너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하고 있다, 조금만 더 힘내라, 내가 도와주겠다, 이렇게 열심히 응원하십니다.
왜입니까?
그 분의 아들이고 딸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응원과 간섭이 없다면 우리는 경주를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응원속에 최선의 경주를 함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의 경주 속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기 위해서 제가 버려야 할 것,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 바라보는 일에 주님처럼 경주하지 않고 게을리 했던 것이 있는데 이제는 제가 주님만 생각하면서 경주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의 믿음의 경주를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응원 속에서 조금 더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하나님, 나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들, 무거운 것들,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리겠습니다.
주님 나라를 위해서 주님처럼 목표지점을 보고, 감내하면서 달려보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