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2016년 6월 12일 주일 설교 요약
히브리서 8장 6절-13절 말씀입니다.

잠깐 말씀드리면, 7장은 멜기세덱에 관한 얘기인데, 신비한 존재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의의 왕이라고 합니다. 멜레크(왕)-쩨데크(의) 즉 의가 있는 왕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살렘, 예루살렘의 옛날 이름인데 사사 시대에는 여부스라고도 불리워졌습니다.
살렘의 왕, 즉 샬롬 – 평강의 왕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시작도 끝도 기록되지 않은, 실존인물이지만 마치 신처럼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이미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살렘의 왕이라는 내용이 창세기 14장에 소개되어 나옵니다.
그의 특징적인 모습을 통해서 히브리서 7장에서는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인물을 예로 들며 그리스도의 한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모형론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 있는 8장 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하늘의 진짜를 따라 만든 모형과 같은 것, 본을 따라 지으라 – 이 typos 라는 단어, 산에서 보이던 그 모양을 따라 지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미래의 이루어질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성경에서의 모형론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모든 것을 모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것들, 성막이라든지, 제사와 제사장 등등이 모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7장은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모형을 완성시킨 부분으로 멜기세덱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흠이 있는 레위 계열을 따르지 않고 시편 110편 말씀대로 흠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살렘의 왕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되신 분이시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사와 제사장이 모형으로 끝나지만 않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완벽하게 완성시키셨다고 말합니다.

본문을 따라서 읽어보면 그 완성하신 예수님의 별명을 얘기하고 있는데, 6절을 보면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라고 합니다.
이전 언약과 비교하여 훨씬 더 좋은 언약이라는, 히브리서에 아주 많이 나오는 비교형의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구약에서 비춰진 것에 대한 완성이라는 의미로 더 좋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 언약의 등장을 얘기하는데, 8절이하부터 12절까지 예레미야 31장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언약도 있는데 왜 새로운 언약이 필요한지, 7절에서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첫 언약, 옛날 언약에 뭔가 흠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구약 백성들에게 언약을 주셨는데 그 의도대로 백성들이 의로움에 온전히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켜야만 하는 언약을 지키려고 노력할수록 자기 안의 문제만 더 드러나고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없이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자꾸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자꾸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옛 언약에 비춰서 보니 자신이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찾으며 다른 방법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은혜 속에 들어온 자들이 바로 새 언약, 더 좋은 언약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더 좋은 것이라도, 언약이라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옛 언약에 대한 차이점과 그 원인이 나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옛 언약대로 행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나는 어떻게 새 언약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부담감이 생깁니다.
나에게 더 좋은 언약이 되려면 실제로 내게 어떠한 좋은 점이 있을지 두가지를 설명합니다.

첫번째,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옛날의 언약은 돌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복의 말씀이 많은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 또한 받게 됩니다.
뭔가를 이루려는 마음은 있지만 나는 자꾸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을 발견하고 내 마음이 그렇지 않음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더 좋은 언약은 돌판이 아닌 마음에 새기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더 좋은 언약이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졌는가요? 언약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나요?
아니면 돌판에 새겨져서 자꾸 뭘 지키려다가 안되는 것만을 확인하는지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은 그 언약이 새겨진 마음이 먼저 움직일 것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빌립보서 2장 13절에도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고 원하게 하고 따르게 하신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더 좋은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내 안에 있는 성령께서 마음을 먼저 움직여 주시고 소원을 가지고 움직이기에, 내가 바라는 바를 행하기에, 하나님의 일을 향하고 바라며 소원하기에 더 이상 언약이 족쇄나 힘든 짐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힘든 일을 하여도 그 길을 가고 싶은 자원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옛 언약을 지키던 사람들은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그것이 되지 않고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을 마음 속에 새긴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먼저 움직이기에 힘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마음을 먼저 움직여 주시는 그 분을 따라서, 더 좋은 언약이 어떤 것인지 맛보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기도하셔야 합니다.
더 좋은 언약을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두번째, 왜 더 좋은 언약인지 11절과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옛 언약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인데, 이 더 좋은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새 언약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이, 제일 편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때에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 잘 맞고 잘 통하고, 오해하는 것이 별로 없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더 좋은 언약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에서 장벽이 없고 어려움이 없습니다.
죄라는 장벽이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어렵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가까운 관계는 아주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예배시간 뿐만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불편한 오해가 생기면 견디지 못하고 빨리 풀어야만 하는, 해결을 위해서 대화도 하고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구체적인 얘기가 오고 가면서 서로를 제대로 알아갑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까?
가까운 관계가 되기 위해서,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얘기를 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기쁨이 더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매일이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좋아하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하나님을 좋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생각하고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의 주인, 나의 구원자로 고백을 한다고 하면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안됩니다.
예배의 시작에서 읽은 시편 16편을 다시 읽으면 이렇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바라보면 내 영이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왜인가요?
하나님을 정말로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좋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가지면서 부담을 갖는 것 같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남녀의 사랑의 신비,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감동, 유머감각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닙니까?
하나님을 볼 때에 이러한 선함과 기쁨을 느끼며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 우리, 오해하지 않았으면, 선입견을 내려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그 기쁨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그렇게 부담스럽게 여기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더 좋은 언약 안에 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장애물이 없고 방해할 사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더 좋은 언약 가운데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새겨주신, 마음의 감동을 따라서 행하게 하십니다.
그를 따라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것이 바로 더 좋은 언약입니다.
더 좋은 언약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삼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설레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싶고, 이전에 잘 못 알았던 것을 교정하고 싶고, 그래서 더 기도하고 싶고 더 예배하고 싶고, 하나님을 더 생각하고 싶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싶고.
이러한 선함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