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3일 주일 설교 요약
히브리서 10장 26절-39절 말씀입니다.
개혁주의 5대강령, 혹은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도 하는 TULIP이 있습니다.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칼빈주의라고는 하지만 칼빈이 직접 얘기한 것이 아니라 알미니안주의 신학사상의 잘못된 것에 대하여 얘기하기 위하여 1618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회의한 결과입니다.
특히 다섯번째는 성도의 견인,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고 이끌어주신다, 견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내용들은 차치하고라도, 다섯번째 내용은 이러한데,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그 구원을 잃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끝까지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정말 좋은 내용입니다.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는지 아니면 구원받은 자는 끝까지 구원받은 채로 가는 것인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물론 잃지 않고 구원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정적으로 우긴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다고 정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얘기를 하듯이 히브리서 본문의 말씀에서는 경고문구들이 나옵니다.
2장 1절-4절, 3장 7절-18절, 6장 4절-8절, 10장 26절-31절, 12장 25절-29절에 나옵니다.
오늘 말씀, 26절-2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어떻습니까? 걱정되는 문구가 아닙니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지식이 있었는데, 어떤 문제로 인하여 속죄의 제사도 없고 심판의 불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처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로마서 8장 38절 39절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정말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내가 그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중간에 어떻게 될까봐 걱정하거나, 내가 혹시 천국에 못가면 어떡하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 그런 분인줄 믿습니다.
고의로,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죄를 짓고도 무감각하고 회개할 생각도 없는 사람을 짐짓 죄를 짓는 사람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그의 제자들에게서 직접 복음을 듣고 접하고도, 기적적인 일을 체험하고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전히 자신과 별로 상관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진정 그 공동체 속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지난주 설교 내용에서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얘기처럼, 짐짓 죄를 짓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엄청난 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방관자로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고, 심지어 죄를 지어도 회개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에 죄에 대해서 걱정하고 근심하고 염려되는 마음, 그 마음이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아무나 갖는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 자신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잠시의 감정변화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히, 천국 못가면 어쩌나 지옥가면 어쩌나 고민과 염려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다섯번이나 심각한 경고의 메시지가 나오는데 어떤 것이 맞을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너희에게 영적인 긴장감,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진지한 고민 말입니다.
우리 삼일교회 성도님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진지한 고민이 매일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러한 진지한 고민은 공동체 내에서 함께 해야합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죄를 범하고도 무감각하게 있다가 심판을 받는 그런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을 읽겠습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너희는 서로 돌아보고 권하라고 합니다, 격려하라고 하고, 잘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고민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공동체에서는 특별한 차이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입니까?
32절부터 34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26절의 말씀과 비슷하게, 진리를 받은 후,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큰 싸움을 견뎌낸 사람들입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고난을 겪고 살았던 사람들인데,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기억하기에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힘든 것은 생각하기 싫습니다.
그런데도 기억하라는 것은, 너희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성도의 삶을 방관하는 사람과는 다른, 차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에 생각하고 되새기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습니다.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구원이 좋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막상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과 부딪힙니다.
기본적으로 이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하기에 그렇습니다.
사탄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고난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과 신앙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이 있었고, 그것을 잘 견디어 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왜 고난을 받았는지 당시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 예수님에 관한 구원의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마음이 뜨겁고 주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 때문에 명성도 친구도 소유도 다 포기했었습니다.
여기서 기억하고 되새기라는 것은 사실, 그 때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그 순간을 떠올리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했던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넘어지기 쉽지만, 그 때에 내 안에 있는, 크지는 않을 수 있더라도 주님께로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떠올리고 주님 앞에 고백해야 될 줄 믿습니다.
한 번은 그런적 있지 않습니까?
구원에 대해 고민이 되거나 한다면, 정말 그 때 내가 주님을 향한 마음이 진심이었는데, 사랑했었는데, 그 고백이 진짜였는데, 이렇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진심어린 사랑이 있으면 용기가, 담대함이 생깁니다.
부족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고백을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그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기억이 없습니까?
지금부터, 오늘부터 하십시오.
주님 제가, 믿음이 크지는 않지만 정말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사랑의 마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연약할 때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너희가 큰 싸움에서 이긴 그 순간, 너희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해요 말로 다 표현 못해도, 라는 찬송가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마음 속으로 주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우리가 가져야 할 차이점, 35절부터 39절까지를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고난과 비방을 당하면서도 왜 기쁘게 감당하였는가?
그들에게는 끝에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영구한 소유,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을 때에 인내하라고 한다면 어렵지만, 끝을 바라보고 살 때에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보상을 생각할 때에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믿음의 신념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끝이 중요합니다.
과정의 무의미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이 어떠한가를 바라보고 사는 것과, 현재만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담대함이 없는 사람은 38절 39절에서 그들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겁에 질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끝이 보여야, 내가 나아갔을 때에 뭔가가 있는 것이 보여야 나아갈텐데 그렇지 않으니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누리고, 해보고 살다가 죽으려 하는 인생이라면 고난을 이기는 인생이기는 커녕, 교회에 나가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하고 싶고, 부러워하며 살면 그렇습니다.
큰 믿음의 희생을 하지 않았어도, 심적으로 손해본 것 같고, 못해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끝은 이런 것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인내를 가지고 시험을 쉽게 이기는 것입니다.
처음엔 좀 어려울지라도 점차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더 큰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는 신앙인격이 변합니다.
성숙해집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세상 맞춤형 인간이 아닌, 천국 맞춤형 인간이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끝을 바라보게 되고, 신앙인격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 끝의 찬란함을 바라보고, 그 찬란함에 어울리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천국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에게는 세상과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며 그냥 방관만 하는 그런 사람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로 향한 진심어린 사랑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 때문에, 어려움을 이긴 사람들, 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기에 더 이상 이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끝의 찬란한 영광을 준비하며 사는 천국 맞춤형 성도들인줄 믿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도, 내가 살아가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 하나님께서 주셨던 믿음의 차이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이라면 오늘 이 순간부터 주님께로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쌓아나가게 하여 주시고,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우리의 눈을 열어서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각 사람 가운데에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