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6일 주일 설교 요약
히브리서 9장 19절-28절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시작부터,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다, 레위 계열이 아닌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다 (멜기세댁의 자손은 아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중보의 역할을 온전히 하지 못했지만 홀로 온전히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셨다, 자신의 속죄를 위해 먼저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다, 라는 설명이 이어지고 이제 9장부터는 성막, 지성소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림을 보며 설명하자면, 울타리가 있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대로 동서남북에 네 족속씩 흩어져서 진영을 치고, 중앙에 울타리도 치고 텐트를 올립니다.
구름기둥이 있는 그 텐트가 성막입니다.
성막의 지붕은 세겹으로 되어 있는데, 염소털, 수양가죽, 해달가죽으로 성막을 잘 덮습니다.
출입구 안에는 2:1 비율로 나눠져 있는데, 첫부분이 성소, 뒷부분이 지성소입니다.
마당에는 제물을 태우는 번제단이 있고, 물을 담는 물두멍이 있어서 제사장이 손을 씻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성막 안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진열해 놓은 떡상, 금촛대, 향이 피워져 있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에는 금향단이 지성소 안에 있다고 하지만 출애굽기와 레위기에는 언약궤만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향을 피우면 그 향이 지성소를 꽉 채워서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스룹 문양의 커튼을 젖히고 지성소로 들어오면 언약궤 위에도 스룹의 형상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모세의 십계명 돌판이 들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첫부분에는 다른 것도 있다고 하지만, 이것도 언약궤 속에는 있지 않은 것으로 출애굽기와 레위기는 설명합니다.
언약궤 “앞에”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언약궤의 위 뚜껑은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르는 속죄소라고 합니다.
성소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막 안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죄인을 만나주시고, 용서의 은혜가 있는 곳이고, 제물을 받으시는 곳입니다.
성막은 그야말로 참 좋은, 하나님의 임재, 말씀,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성막이 없다는 것, 성막이 없는 이스라엘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막이란 범접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8절-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이 본문을 보면, 성령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그 율법을 보면 이 성막이 서있는 동안의 한계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막 제사 제도로 말씀하신 것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하나님이신데,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뭐가 있을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 법 합니다.
빤히 보이는 그 성막, 하나님이 계시는 곳,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 은혜가 있는 곳이 백성들과 분리되어 있고, 접근할 수 없다는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9절의 내용대로,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을 드리는데, 온전한 관계를 위하여 여러 제사를 드리는데, 제사를 드린 후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안이 있다는 것은 막연한 기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는 것, 그 분의 생각이 마음 속에 있고, 하나님이 좋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불편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심지어 제사장들 사이에서도 제사를 드린 후에 찜찜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닌가요,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제사장의 꽁무니만 바라보는 백성들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지성소로 들어가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는데,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평안함이 없고 불편하고, 기도를 해도 뭔가 막혀있는 것 같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남들을 구경만 하는 것 같다면.
구경꾼일 뿐입니다. 길이 분명히 보여야 되는데, 보이지 않고, 시키는대로 했는데도 양심상 뭔가 꺼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본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직접 지성소로 들어가라.
어떻게 들어갑니까?
제사장조차도 양심을 온전하게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
23절부터 26절까지를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곳은 ‘다른 성소’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때에는 성막이라는 텐트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솔로몬이 지은 솔로몬 성전, 훼파되었다가 포로기에서 돌아와 지은 2차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 나중에 헤롯대왕이 화려하게 증축한 것을 헤롯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A.D. 70년경에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지요.
그런, 성막보다도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제물이시면, 예수님께서 길을 열어놓으셨으면 예수님께서 직접 그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가셔야 될텐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실 뿐 아니라 직접 제물이 되셔서 제사를 드리셨는데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이셨다, 라고 본문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지성소는 바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성소라고 하면서 엉뚱한 곳으로 가니까, 너희가 가야할 곳은 아버지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등불이 있어도 잘 보이지 않고,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그 지성소, 일반 백성은 알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12절의 말씀처럼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의 상징으로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 커튼이 찢어졌고, 이제는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놓을테니까 너희가 지성소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하늘의 성소는, 아무리 궁금해도 들어가지 못했던 그 곳의 문을 주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하늘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가고 주님께 기도하고 성령을 체험하는 것에 꺼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은 이 땅 위의 지성소가 아닌, 하늘의 지성소입니다.
이 땅의 레위 지파도 들어가지 못한 곳, 우리가 들어갈 곳이 바로 하늘의 지성소입니다.
27절과 28절 말씀을 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심판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이 없기에 성경말씀이 설명합니다.
두려움의 그 순간을 예수님께서는 기쁨의 순간으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새해 첫날을 대속죄일로 지키고 있지만, 똑같은 이 순간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일을 용서해주시고 새로 시작하는 날이라고 믿기에 그렇습니다.
죽음과 심판.
모든 인류들이 두려움의 숙제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인하여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여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천국은 정말 기대할만한, 가고 싶어야 할,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라고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 땅의 삶이 얼마나 좋든지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는 그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도 둘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야만 하는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는 지성소가 그들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에는 지성소가 있어야 합니다.
지성소의 핵심은 하나님의 보좌이고, 거기서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평강과 은혜를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약함,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를 다시 살리시고 나를 회복시키시는 곳이 주님의 보좌입니다.
주님께서 열어놓으신 길이기에 이제 우리에게는 아무런 막힘도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가운데 막힘이 있나요?
기도에도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주님과 1대1로 독대하며 주님의 보좌와 나만 있는데, 뭔가 막히는 것이 있나요?
그런 것이 있으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성소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보좌 앞에 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곳에 내가 직접 들어가서, 주님의 지성소를 확인하고 주님을 더 알아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고백할 때에 거기에서 여러분의 예배가 살아나고, 기도가 회복되고, 심령이 회복되고, 찬양이 찬양다움으로 울려퍼질 것입니다.
하늘의 지성소, 날마다 들어가서 주님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