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2016년 3월 27일 주일 설교 요약
고린도전서 15장 50절-58절 말씀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성도들이 안식 후 첫날 매 주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매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십자가를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부활 때문인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진정한 소망으로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탄절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있지만 부활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것도 의미있고 중요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바로 이 날을 기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에 하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기독교일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날 이 땅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의, 성도의, 하나님의 자녀의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얘기하듯,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하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혹은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숨겼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을 드러내어 부활이 거짓이라고 증명한 관리도 없었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사흘만에 시신을 숨기기 위해 모의를 꾸몄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서 실망해 고향으로 갔던 제자들이 갑자기 다시 용기가 생겨나 거짓으로 부활을 증거하여 순교를, 죽음을 자처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에 대한 목격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인간의 모습처럼 죽으시고 무덤에서 모두 끝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부활체로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과 나와의 연결 고리,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87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문 87. 부활에 관하여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답. 우리는 마지막 날에, 의인이나 불의한 자를 불문하고, 죽은 자들이 모두 다 부활할 것임을 믿는다. 그 때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무덤에 있는 죽은 자들의 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 그들의 영혼과 다시 연합하여 영원히 있게 될 것이다. 의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그리고 그들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능력으로 영적이며 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의 몸은 그들이 거역하던 심판주되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부끄러운 부활을 맞이할 것이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때에 죽었던 육신이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몸은 그저 흙으로 만들어진 쓸모 없는 껍데기가 아닌, 소중한 육신입니다.
예수님 역시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부활하시지 않고 그 몸 그대로 부활하셔서, 부활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영적인 눈이 가리워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원래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몸의 부활이 있게 하셨을까요?

첫번째로는, 창조의 완성이기에 그렇습니다.
53절부터 56절까지를 읽습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인 이 땅을 보면 마치 실패한 작품, 불완전한 듯이 보입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우리 조상 아담의 죄입니다.
죄를 범한 순간 이 땅은 불완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령을 가지고 있는 고귀한 존재인데, 우리 자신도, 이 땅도 죄로 인하여 변하였습니다.
죄가 정말 심각한 것은, 저주 파괴 멸망 사망 썩는 것으로 연결되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는 상태가 되어 본 적이 없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스스로의 죄성에 고민을 합니다.
죄악은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마치 실패한 작품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인류는 뭔가를 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살게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파괴되고 멸망될 존재, 단순히 끝나버릴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는 우리의 모습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갈 존재로서, 하나님 창조의 완성이 우리의 미래에 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성도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에 다른 모습이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나는 나 자신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의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 위에서 대충 사는 인생이어서는 안됩니다.

57절 58절을 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핑계로 이 세상을 막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기에, 그 때의 나는 나일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땅 위에서 성실하지 않았던 사람이 주님을 만났을 때에 감사하고 갑자기 친해질 수 있겠습니까?
구원의 확신은 있어도 부활의 순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면 예수님께 아주 죄송한 마음일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몸은 돌아가시기 전의 몸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도의 영광 역시 우리의 지금의 삶, 생활, 몸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부활을 믿는 성도는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32절부터 34절을 읽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깨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돌아간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셔서 다시 불러 일으켜 세우십니다.
왜일까요?
베드로 역시 부활하여서 주님을 만나야 할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세상 살면서 우리를 설레게 하고 흥분되게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민 생활 가운데에서 바쁘고 지치고 힘든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정말 기쁘게 하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내 몸은 부활할 것입니다, 내 몸은 주님과 같은 부활체가 될 것입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을 생각하며 내 안에 있는 절망감이 사라지고 확신 가운데에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삼일교회 성도님들.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더 할 나위 없는 최고의 소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보여주셨습니다.
얼마나 영화롭게 변화될지, 참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그 날을 기다리며 주님 앞에서 그 날을 준비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성도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