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섬김

2016년 3월 20일 주일 설교 요약
마태복음 21장 1절-11절 말씀입니다.

매번 종려주일마다 선택하게 되는 본문입니다.
함께 생각하며 나누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기분 좋은 날이 바로 종려주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추대하고 싶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고, 구원하시는 메시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확실히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는 것이, 예수님을 자신이 꿈꾸는 세계의 왕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의 나라와 그들이 기대하는 바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왕이란 통치권을 가진,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왕으로 인정한다면 내 삶이 그 명령체제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신 것 역시, 너의 삶의 방향을 돌이켜 돌이켜서 다른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왕이신 하나님이 법칙을 정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구원 받아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 위의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것이 천국 백성입니다.

한 편,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모습은 어떠한지, 나귀를 타고 오셨다고 하는데 본문 5절과 7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큰 무리가 소동을 일으키는 중심에 이렇게 왕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식민지 현실에서 상당히 민감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운데에서 본문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왕이라면 백성을 잘 위하기만 하면 되지 굳이 겸손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권력을 가져서 완벽한 통치권의 기반을 세우는 것이 왕일진대, 겸손해서 나귀를 타셨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또한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세배대의 아내 일화가 기록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왕중의 왕이 겸손하고, 섬기려 오셨다는 것이 사람의 시각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도 교만한 왕이 되지 말라고 주문하십니다.
왕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왕은 겸손하지도 않았고, 교만했고,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겸손함을 보여주신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파워를 지니고 계셨지만, 스스로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고 따르셨던 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길을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겸손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내 욕심에 끌려가고, 내 기준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올바른 모습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교만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성을 가진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겸손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섬김은 무엇입니까?
쉽게 떠오르는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 – 유대인이 아닌 종들이 하는 일을 하시는 모습이 우선 생각날 수 있습니다.
병 고쳐주시거나 어려운 상황을 도와주시는 것이 섬김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섬김은 그것이 중심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대속물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장 28절의 말씀이 그 핵심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나의 죄값을 대신 치러 죽으시는 것인데, 사람으로서는 이것이 참 믿기가 힘듭니다.
그렇지만 오직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직접 대속물이 되어 주시는 바로 이것이 섬김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내가 바라는, 내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 25절을 읽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섬김은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상대의 필요를 정확하게 보고 그 부분을 채워주시는 섬김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충족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는 우리를, 섬김의 절정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살 수 있는,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겸손하고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며, 그 뜻을 궁금해하며, 알고 싶어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겠다는 것은, 내가 슬프고 힘들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겸손한 삶을 산다면 행복이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섬김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겸손함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마음으로 오셨지만 사람의 죄성과 욕심에 휘둘리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 종려주일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겸손한 왕, 섬기러 오신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한 섬김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부르시는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끝까지 겸손과 섬김을 잃지 않고 이 땅의 삶을 다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아야 될지 궁금해하면서도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하며 헤매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처럼 그렇게 겸손하게,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삼일교회 성도님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