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바디매오

2016년 3월 13일 주일 설교 요약
마가복음 10장 48절-52절 말씀입니다.

사순절 기간이 빨리 다가오기에 예정되었던 “마가복음에 나오는 단역들” 시리즈에서 골라내어 바디매오 사건으로 바로 접근하려 합니다.
주인공은 맹인 바디매오인데 저에게는 이 분이 바보처럼, 친근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인공지능 컴퓨터와 바둑 대결을 한 프로 9단 바둑기사의 얘기가 지난주에 화제였습니다.
기계에게 연속으로 져서 충격적으로 3연패를 기록했습니다.
이 딥마인드라는 인공지능은 자신이 배운 내용을 적용하여 스스로 다음 수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볼 수 있는 기능을 맹인으로 살던 바디매오에게 주셨습니다.
바디매오란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이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볼 수 있는 기능을 주신 것입니다.
다음 내용인 11장부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종려주일의 광경이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시기 전, 사람들이 환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기적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특별한 내용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딥마인드라는 인공지능을 설계한 하사비스가 꿈꾼 것은, 배운 것을 응용하여 스스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기계에게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고, 결국 그것을 해냈습니다.
바디매오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에, 눈을 떠서 세상을 보고자 하는 열망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나사렛 예수가 온다는 소식, 유일하게 전달될 수 있는 입소문의 방식으로 유명해진 그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는 난리를 치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고 막으려고 했지만 그의 열망은 모든 장애물을 넘었습니다.

이미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은 보고 싶다는 열망이 특별히 없을 것입니다.
맹인이라도 아무런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뭔가를 보고 싶을 일도 없을 것이고 내가 아는 이것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드시 보고 싶다는 열망이 바디매오로 하여금 주님 앞으로 뛰쳐 나가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주님께로 뛰어 나가고 있습니까?
열망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아무리 막아도, 핀잔을 주고 말려도, 주님 앞으로 뛰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바디매오의 마음을 아시기에 이리 오라고 부르시고 그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눈을 그냥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52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눈을 떠 보고 싶어하니 내가 이제 눈을 고쳐주겠다, 라고 얘기하지 않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바디매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달려 왔을 때의 그 마음을 아셨고, 주님을 찾는 그 소리를 들으셨기에 그러셨습니다.

47절을 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바디매오는 이렇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출신 지역과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약속하신 메시아요,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조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새로운 나라를 우리에게 펼쳐주실 메시아이십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다윗도 고백했던 그리스도, 주님이시라고 얘기합니다.
나의 메시아,나의 구원자여,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얘기합니다.
보지 못하기에 불쌍한 인간의 형편에 대한 하소연일까요?
사람이란 자신의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고 익숙해지지만, 그것이 정상은 아닙니다.
스스로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확실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자신이 사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살 수 없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제 내가 살아온 것이나 익숙함과는 다른 인생, 구원의 길, 주님께서 보여 주셔야만 볼 수 있는 그 길을 보여달라고, 내가 그 길을 따라가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기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네가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선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네가 눈을 떠서 세상도 보게 되었지만 믿음의 눈도 떴다, 눈 뜬 다른 사람들도 못보는 특별한 것을 보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러한 신앙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참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 이제 맹인이 아니라 눈을 뜨게 된 바디매오가 되었는데, 마치 눈을 뜨자 마자 바보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왜인가요?
이제 눈을 뜨게 되었으니 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바디매오가 눈 뜨고 나서 한 일이 무엇인지 마지막 52절 내용에서 다시 찾아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을 따라 갔다고 합니다.
고마워서,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하면서 따라 간 것이 아닙니다.
수난을 당하는 예수님을 보아야만 하는 일주일인데 그를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 뜬 사람도 모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믿음은 무엇인지, 구원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보는 눈과 믿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삼일교회 성도들에게 이 눈과 마음을 주시기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 눈과 마음이 없으면 구원받았다고 얘기하더라도 혼동이 오고, 누가 내 인생을 막으면 그냥 휩쓸려버립니다.
그러나 이 눈이 있으면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고 평안한 길인가를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인공지능을 만든 하사비스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기계에게 지능을 주고 싶어했는지, 신문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 마음과 눈을 주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도록 큽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내가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열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저와 여러분이 이 바보 바디매오처럼 바보스럽게 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세상이 얼마나 놀랍게 변하는지 모릅니다.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눈, 마음은 따로 있는 줄을 믿습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바보스럽게 보여도, 바디매오가 보았던 그 예수님을 보고 따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