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하게 됩니다

2016년 2월 28일 주일 설교 요약
하박국 3장 16절-19절 말씀입니다.

훌륭하게 만드시고 멋지게 공연한 찬양입니다.
어떤 분의 말씀에 의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독론적으로 가사를 은혜롭게 잘 썼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렇게 멋진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없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인 찬양 또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1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아주 오래된 찬양의 가사로도 쓰여졌는데, 즐겁게 손뼉치며 찬양하지만 막상 찬양이 끝나고,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에 문제는 시작됩니다.
나는 주님만으로 즐거워하겠다고 찬양하지만 막상 현실로 돌아오면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엔, 찬양하는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생산 활동, 직업인 밭에 소출이 없어 굶어 죽어도 좋다고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통 신앙생활하며 기도하는 것이 하는 일의 형통, 가족의 건강인데, 이런 것들 다 없어도 하나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살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보면서 불러야 하는 찬양입니다.

이 하박국 선지자는 무슨 이유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두가지를 생각해봅니다.
2절과 3절 말씀을 읽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3장의 앞부분은 그의 기도이고, 그 기도가 끝났을 때에 뒷부분에서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앞부분의 엄청난 기도는 수년내에 부흥을 구하는 것인데, 부흥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이 성령행전이라고 불리는 가운데에서 이야기의 전환이 될 때마다 나오는 구절이 바로 ‘주의 말씀이 흥왕해졌더라’라는 문장입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이 부흥하는, 우리를 이끌어 나가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에서 요청하는 부흥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 징계를 우리 민족 가운데에 나타내 달라는 요청입니다.
지금 자신의 형통을 얘기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진작부터 말씀하시고 계획하셨던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심판의 무서움과 포악함에 질린 자포자기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러한 담대함이 생겼을까요?
3절 이후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이스라엘 출애굽 사건 가운데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를 자세히 기억하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담대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앞부분에 시청한 찬양과 지금 하박국 선지자의 차이점을 굳이 들자면, 앞의 찬양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노래한 것에 비해 선지자의 찬양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나 자신에게 이러한 분이시라는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의 중심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나에게는 누구이신지,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을 제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지만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만 제대로 고백해도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도가 바로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면서 이러한 기도를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삼일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하게, 성경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선지자에게는 바로 이러한 고백이 있었기에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모든 것이 없어지더라도 괜찮다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무모한 듯 보이는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가지 더 나누겠습니다.
이 무모한 듯 보이는 찬양의 또 다른 동기 하나는 13절부터 16절까지에서 찾습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6절을 보면 너무나 심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묘사합니다.
수 년 내에 나타내소서, 라고 2절에서 기도하였지만 그 환란의 고통이 아주 감당하기 어렵다는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7절의 찬양이 이 극심한 고통의 표현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고통이 느껴지지만, 이 고통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알고 있다고 고백하기에 그렇습니다.
13절의 산과 바다에 기적을 베푸시고 해와 달을 움직여 활동하신 것이 모두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 자기 백성을 위해 엄청난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니 자기 백성만을 위하시는 분이라고 믿음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힘든 고통 이후에도 찬양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이 다가올 수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나를 끝나게 하지 않을까, 다가올 것만 같은 그런 고통이 보이고 느껴지고 생각될 때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그 분의 자녀만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처럼 활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끝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광신과도 같은, 무모한 찬양으로 보이는 이 고백은 다만, 펄펄 끓어오르는 신앙을 보여주는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때하여 뜨거운 찬양을 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신앙의 모습이라고 하박국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근거, 논리는 바로 믿음의 논리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평생 신앙생활 하더라도 한 번도 끓지 못하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누가 하박국 선지자를 비정상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는 지금, 당연하고 아름다운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일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극히 정상적인 믿음의 논리를 가지고 이 아름다운 찬양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 우리의 생각은 어디에 있나요?
때로는 우리가, 교회 의자에 앉아서 부르는 이 찬양도 정말 우리 마음 속에 어느 구석에서 울려 퍼지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주님 앞에서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하나님, 평생을 살아도 제대로 한 번 끓어보지도 못하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 비록 남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비정상적인 내용을 가지고 고백하는 것 같을지라도 분명한 믿음의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