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괴담

2015년 6월 7일 주일 설교 요약

다니엘 5장 13절-31절 말씀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궁중괴담이라고 지어봤습니다.
괴담을 소재로 한 무서운 영화들도 있는데요, 오늘 얘기할 괴담의 전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벨사살이라는 왕이 있는데, 어느날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쓴 글씨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천 명을 불러 큰 연회를 할 때에,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전의 기명-잔-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또 자신들이 금, 은, 동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했습니다.
허공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쓴 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닌, 석회벽에 확실하게 새겨진 글이었습니다.
아무도 해석을 못하자 다시금 다니엘이 천거되어 해석을 하게 되었는데, 벨사살 왕은 크게 놀라 몸이 떨리고 그 날 밤에 급사, 죽게 되는 것이 괴담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왕비의 천거로 인해 해석자로 나선 다니엘도 놀라며, 나라는 국상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정확한 사인을 알 수는 없지만 자연사가 아니라 이 사건의 영향인 것,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벨사살 왕이 죽게 된 두가지 이유를, 오늘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그가 ‘알면서도’ 바로 행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한 길로 걸어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17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자면, 그는 그의 부친인 (실제 의미로는 선왕인) 느부갓네살의 삶을 통해서, 이 제국이 어떻게 세워지고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나옵니다.
22절을 보면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 마음을 낮추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오고, 23절에는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는’ 큰 문제가 나오는데,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을 – 다 알고도 오히려 순종하지 않고 반대로 행하는 이 태도를 – 조심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많은 매체를 통해 배웠기에 우리는 듣는 자가 아닌 평가하는 자로 위치를 옮겼으면서도, 이렇게 잘 알면서도 우리는 행하지 않습니다.
벨사살 왕만이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행동에 대해 반드시 물으십니다.
시편 19편 23절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 전 성경에서는 고범죄라고 얘기합니다, 고의로 의도하여, 다 알면서도 도리어 자신의 뜻대로 거꾸로 죄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 고범죄에 해당하는 단어는 무례, 교만 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같은 잘못을 하더라도 성직자의 잘못과 다른이의 잘못, 신자의 잘못과 비신자의 잘못을 우리는 똑같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을 통해 똑똑히 그 분의 능력과 뜻을 보였는데도, 벨사살 왕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자는 공포를 느끼지만,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과 같은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에 억눌려 사는 자는 공포에 휩싸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의 뜻이 나를 통해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그럼 언제 생길까요?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할 때에 경외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렙산에서 명령한 바와 같이, 내 앞에 모여 내 말을 듣고 경외함을 배우고 자녀들에게도 가르치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경외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를 통하여 감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어, 그 듣는 이를 감화시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외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벨사살 왕에게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삶을 살다가 어느날 공포에 짓눌려 끝을 맺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기에 그는 심판을 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는, 이 벨사살 왕은 가만히 두어도 오래 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이 벨사살 왕은, 신 바벨론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바사제국이 바벨론을 물리치고 새로운 패권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국민들은 이미 느부갓네살 왕조, 벨사살 왕에게서 마음이 떠나가 있었고 오히려 새로운 바사제국의 고레스 왕에게 더 마음을 주었다고 합니다.
자기를 과시하고, 연회를 열었지만, 꺼져가는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그러져만 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니엘도 좀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자신들이 포로로 와 있는 바벨론에도 계속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니까요.
가만히 내버려둬도 망해가는 왕에게, 하나님의 중요한 싸인이 나타납니다.
21절 후반부를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라고 나옵니다.
23절 후반부는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왕의 모든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길을 작정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과 같은 강력한 위인이었기에 세계를 움직인 것도 아니고, 벨사살 왕의 사망도 그저 망해가는 왕조의 개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왕의 생명과 왕조의 흥망도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히 하나님께서 싸인으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써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어지고 세어지고 무게가 달리고 나누어졌다는 이 아람어 구절을 읽기는 해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말을 해석해주었습니다.
메네, 하나님께서 이 나라 이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다.
데겔,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여서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
베레스, 메대와 바사에게 나뉘어진다, 차기 패권국도 하나님께서 뜻대로 일으키시는 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도 아니고 제국을 운영하지도 않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간섭이라는 것은 부정적으로 들리는 단어이지만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좀 더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나를 간섭하는지 나를 위해 돕는 것인지의 판단 기준은 내 감정 내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 기준을 넘어서 그 분의 간섭을 인정하고, 필요로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함을 심판하시고, 적극적으로 세세하게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원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간섭이 나의 길을 가로막고, 나를 넘어지게 할지라도 그 분의 간섭은 나를 교만하지 않고 겸손의 태도를 갖게 합니다.
우리는 간섭을 요청해야 합니다.
내 주관과 내 욕심 내 지혜 안에서만 판단하지 않도록 내 삶에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함을 받아야만 복 받은 성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손이 돌보는 양 (시편 95편)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세상의 것에 신경쓰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섭하심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왕, 한 나라의 일 뿐 아니라, 힘 없는 양인 우리에게도 간섭하심이 필요하다고 기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께서 들려주시는 음성 가운데에, 새로운 도전을 받습니다.
듣고, 알고도 엉뚱한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듣는대로 깨닫는대로 오히려 더 마음을 낮추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대로 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